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1세 (문단 편집) == 그 이후 == 크롬웰파의 잔부의회(찌꺼기 의회)가 연 [[https://en.wikipedia.org/wiki/High_Court_of_Justice_(1649)|1649년의 고등법원]]과 날치기 재판은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이후 왕의 재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무효화 처리 되었다. 이는 국왕이 합법적으로 처형된 것이 아니라, 내란에 패해 반역자들에게 살해된 것이며, 애초에 법원은 왕을 재판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이는 법률이 아니라 군대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왕은 재판기간 내내 제대로 된 대우와 정당한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법원은 공정한 척조차 하지 않았으며 무죄추정도 거부당했고, 찰스 1세는 재판 내내 감시를 위해 군대에 고용된 경비원, 정보원, 포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찰스 1세의 처형 당시 국민들은 일반적인 환호대신 숨을 죽였고 유럽의 국가들은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이는 국왕에 대한 순교자적인 모습을 부각시켜 동정여론을 불러일으켰다.[[https://www.historytoday.com/archive/execution-charles-i|#]] 왕이 처형된 이후 [[올리버 크롬웰]] 독재가 끝나고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가 되었을 때 화해를 위해 배상 및 망각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왕을 살해한 시해범들은 예외였다. 1649년 고등법원에서 왕을 처형한 것을 주도한 이들은 곧바로 체포되어 1660년 특별 재판에서 대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런던의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 또는 타이번(Tyburn)에서 10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해지고 끌려가 사지가 찢어졌다. 이후 왕의 재판에 찬동한 19명이 끌려가 종신형에 처해졌다. 왕정복고 이전에 사망한 자들 역시 대반역죄로 [[부관참시]] 되었고, 재산 역시 몰수되었다. 국왕 시해자들 중 일부는 해외로 도피했지만 정부에서 끝까지 추적했고 세명을 추적해서 체포해 처형했다. 한편 이미 죽은 올리버 크롬웰, 헨리 아이어튼, 존 브래드쇼의 시신은 특별히 참수되어 웨스트민스터에 효수되었다.[[http://law2.umkc.edu/faculty/projects/ftrials/charlesIlinks.html|#]] 이후 찰스 1세는 순교자로 취급되어 잉글랜드 성공회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